지난 8월 15일 개봉일에 맞춰 영화 오펜하이머를 관람하였다. 개인적으로 영화 취향이 다르겠지만 필자는 무척 흥미로웠으며 재밌게 보았다. 근데, 스토리가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 장면으로 가뜩이나 과학에 대한 용어가 약한 일반인들은 재밌으면서도 난해했을 것 같다.
제일 좋은 방법은 책을 읽고 관람하는 것이 좋으나,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으니, 여기 포스팅에서 오펜하이머에 대한 요약된 내용을 한 번 읽고 보면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쭈욱 읽어보시기 바란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연출한 영화 '오펜하이머'가 첫 개봉일부터 50만 관객을 넘기며 BOX OFFICE 1위를 차지하였다. 영화진흥위원회 통계는 지난 8월 15일 오전 7시 기준으로 '오펜하이머'는 552,942명 관객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전한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2006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카이 버드(Kai Bird)와 마틴 J. 셔윈(Martin J. Sherwin)의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2010년에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국내에 처음 소개됐는데, 그때가 제17차 아세안 지역 안보 포럼 각료 회의에서 북핵 관련 6자 회담 재개를 촉구하던 시기였다. 북한 핵 시설을 둘러싼 국제 사회의 긴장 상황은 핵무기가 처음 만들어진 지난 세기에 이미 예측된 바 있다.
이렇게 첨예한 대립에서 현재 진행형인 대한민국이 주목할 만한 인물이 바로 오펜하이머이다. 2차 세계 대전 승리를 위한 경쟁 속에서 만들어진 핵무기는 탄생 직후부터 엄청난 파괴력과 남용 가능성으로 말 그대로 폭탄이 되어 왔다. 그리고 원자 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지휘자며 원자 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일생에서도 극적인 순간들을 안겼다.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대한민국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저자들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점을 짚었다.
세계적으로 냉전은 종식됐지만, 한반도의 핵 대결은 여전히 공포스러운 현실로 남아 있다. 오펜하이머는 핵 확산의 불가피성을 처음부터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1946년 제안한 핵무기 국제 통제 계획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데, 오펜하이머의 삶과 고민은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의 독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역자인 최형섭 교수도 “오펜하이머는 처음부터 서로 타격할 수 있는 핵 보유국 사이의 균형을 통한 세계 평화라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핵 확산 통제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고, 한반도는 안타깝게 그 최전선에 놓여 있다.”라고 썼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구성은 크게 5 부문이다. 1부는 오펜하이머 가족사와 어린 시절, 물리학자로 성장하는 단계를 보여주며, 2부는 오펜하이머의 오랜 연인과 아내 그리고 그의 인생을 바꾼 만남들을 소개한다.
3부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지휘자로 오펜하이머의 활약 과정과 트리니티 원폭 실험 성공 순간이며, 4부에서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계기로 달라진 그의 심경과 입장이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그리고 5부에서는 매카시즘에 맞물린 보안 청문회 현장에서 수모를 겪고 물러난 오펜하이머의 말년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대가로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게 되는데,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사이언티픽 먼슬리'에서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들은 또다시 올림푸스 산으로 돌격해 인간을 위해 제우스의 벼락을 가지고 돌아왔다.”라는 표현처럼 맨해튼 프로젝트 참가 과학자들은 연일 언론의 찬사와 대중들로부터 관심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맨해튼 프로젝트 총지휘자 오펜하이머는 점차 인류를 향한 경고의 목소리를 보내지만, 냉전 시대에 몰아친 매카시 광풍에 휩쓸려 일종의 본보기로서 추락해 버린다.
오펜하이머 어린 시절은 세심한 보호와 천재성에 대한 아낌없는 독려 속에서 성장했는데, 오펜하이머는 유년시절부터 독립적이며 경험적인 탐구와 자유로운 정신을 중시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과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이 어린 소년은 훗날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
모순적이지만 사회 정의, 합리성, 그리고 과학에 바친 오펜하이머의 일생은 결국 거대한 버섯구름 아래 대량 학살을 상징하게 되었다.
독일 출신 이민자 가정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오펜하이머가 다녔던 뉴욕 에티컬 컬처 스쿨은 창립자 애들러의 가르침대로 "세상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학교였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에티컬 컬처 스쿨 졸업 후 전혀 다른 분위기의 하버드에 입학한다. 3년 만에 화학 학사 및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나 물리학에 더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를 선택하고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1906년)인 J. J. 톰슨의 연구실로 들어간다.
하지만 신경과민이 점점 심해졌고, 특히 실험 물리학자이며 지도 교수 블래킷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좌절감과 질투심으로 인해 ‘독’을 바른 사과를 블래킷 책상에 올려놓는 돌발 행동도 있었다. 이 사건은 정신과 상담 조건으로 사태가 수습되었다고 하며, 즐겨 읽던 프루스트 등의 문학 작품은 오펜하이머의 정신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1년간의 힘겨운 케임브리지 생활 후 독일 괴팅겐 대학으로 가면서 비로소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 재미를 느꼈다고 한다. 괴팅겐 대학교 이론 물리학 연구소 소장이었던 막스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가 논문에서 제기한 이론적 문제를 두고 고심하는 오펜하이머에게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보른 초청으로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 제임스 프랭크, 오토 한, 조지 웰렌베크, 폴 디랙, 요한 폰 노이만 등과 교류했다. 195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보른은 1924년에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 용어를 만들었고 양자 세계에서 상호 작용의 결과는 확률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평화주의 자면서 유태인이었던 보른은 오펜하이머와 같은 민감한 젊은 학생에게 이상적인 스승이었다.
23세 대학원생 오펜하이머는 괴팅겐에서 무려 17개의 논문을 발표했고, 1년 전의 불안한 감정은 자신감으로 바뀌면서 오펜하이머는 떠오르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으로 돌아온 오펜하이머는 캘리포니아 공대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분교에서 각각 한 학기씩 강의를 했다. 물리학의 미 해결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오펜하이머는 학생들에게 지식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들뜬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는데, 이 분야 전공을 원하면 버클리로 가야 한다는 소문이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920년대 후반부터 왕성하게 학문적 활동을 해오던 오펜하이머는 새로운 시련과 마주친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장악하자 오펜하이머도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같은 해 4월 독일 내 유대계 독일인 교수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대학에서 쫓겨났다.
오펜하이머는 1936년에 진 테트록을 처음 만난다. 심리학도로서 나중에 정신과 의사가 된 진 테트록은 오펜하이머의 “진정한 사랑”이었다. 오펜하이머를 이론에서 행동으로 움직이게 한 것은 그녀의 열정적인 성격이었다.
진의 활동가적 기질과 사회의식이 오펜하이머가 에티컬 컬처 스쿨 시절의 사회적 책무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공산당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요한 것은 당보다 대의였는데 1936년 가을경 그녀가 사로잡힌 가장 중요한 대의는 곤경에 빠진 스페인 공화국이었다.
결혼에 뜻이 없던 진과 결별한 오펜하이머는 그의 아내가 되는 캐서린을 만난다. 오펜하이머의 제자이자 친구인 로버트 서버는 “그녀의 관심은 오펜하이머 경력을 진전시키는 것”이었다. 오펜하이머와 캐서린은 두 자녀를 두고 평생 서로를 보살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와 진과의 관계는 그녀가 자살하기 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훗날 소련의 스파이로 몰리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발발 한 달 전인 1939년 9월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새로운 종류의 강력한 폭탄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라고 경고했다.
이 당시 설립된 우라늄 위원회는 2년 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새로운 무기에 대한 보고서를 받고 나서 활동에 박차가 가해지면서 백악관 직속의 위원회가 새로 구성되었다.
오펜하이머는 과거 정치 활동과 공산주의자들과 교류 이유로 반대가 있었지만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가 된다. 그의 나이 34세 때 일이다. 오펜하이머가 우라늄 관련 회의에서 중요 해결책들을 계속 내놓음으로써 어느새 그가 없으면 관련 업무가 진행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뛰어난 이해력, 열정 외에도 사람 다루는 기술도 갖추고 있었다. 15년 동안 쌓아 온 과학적 업적과 다양한 사회생활을 통해 오펜하이머는 미숙한 과학 영재에서 세련되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로 탈바꿈했다.
오펜하이머는 전국 각지에 퍼져있던 맨해튼 프로젝트 관련 기관들의 연구 개발 활동을 통합하여 사용가능한 핵무기를 만드는 일을 관장하게 되는데, 뉴멕시코 사막 로스앨러모스에 세운 비밀 연구소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포함한 민간인 4,000명과 군인 2,000명이 거주하는 하나의 마을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가면서,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도 조급해졌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의 자살과 그로부터 8일 후 독일은 항복했다. 세그레가 이 소식을 듣고 내뱉은 첫마디는 “우리가 너무 늦었군.”이었다. 로스앨러모스 과학자들은 나치의 굴복을 프로젝트의 정당성으로 삼고 있었다. 세그레는 회고록에서 “이제 폭탄이 나치에 사용될 수 없게 되어서 의구심이 들었다.”라고 썼다.
마침내 7월 14일, 트리니티 핵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연구 성공에 대한 환희, 다음 연구를 향한 순수한 매진. 리처드 파인만을 비롯해 많은 과학자가 역사적 현장에 서있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핵실험 후 로스앨러모스를 휘감은 성취감과는 별개로 오펜하이머는 책임감에 대한 더 큰 고민에 빠졌다. 오펜하이머의 지도 아래 만들어진 원자 폭탄이 이제 곧 사용될 것이지만, 그는 그것이 소련과의 군비 경쟁을 촉발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오펜하이머는 핵무기가 미국에, 더 나아가 전 세계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핵 독점은 유지될 수 없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다른 과학자들처럼, 그는 소련이 3~5년 안에 미국의 핵 독점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핵을 보유함으로써 미국의 안전이 보장될 것이라는 환상은 위험한 것이었다.
냉전 군사 체제에 맞서 싸우던 오펜하이머는 1949년에 핵 군축과 관련된 상황이 호전되리라는 기대를 버리고 자신의 영향력으로 정부와 일반 대중이 원자력에 가지고 있는 환상에 찬물을 끼얹는데 계속 노력했다.
그는 민간 핵발전소에 내재된 잠재적 위험 요소들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이 같은 발언들은 핵 기반 기술 개발을 선호하던 국방부나 전력 산업 관계자들로부터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오펜하이머는 매카시 반공 히스테리가 극에 달하던 시기에 가장 큰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원자의 힘을 이용하기 위한 노력에 앞장섰지만, 그가 동포들에게 위험성을 경고하려 했을 때, 즉 미국이 핵무기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미국 정부는 그의 충성심을 의심했고 그를 재판정에 세우고 말았다.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이사회 의장 루이스 슈트라우스 주도 하에 다분히 악의적인 고발과 불법 도청으로 오펜하이머의 개인사까지 들춰내며 수모를 안겨 준 보안 청문회가 끝났다. 슈트라우스는 개인적 복수심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오펜하이머를 소장직에서 유임시키는 투표를 몇 달 미뤘었다.
그 사이 고등 연구소 교수들은 오펜하이머 지지 공개서한을 작성해 서명을 받을 시간을 벌었으며 연구소 종신 교수들은 모두 서명했다. 오펜하이머는 후두암으로 1967년 세상을 떠나기 1년 전까지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자리를 지켰다.
대략 이 정도로 내용이 요약되는데, 아직 영화를 안 봤다면 더욱 이해도 높은 감상이 되지 않을까 한다.
'tou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스타항공이 특별한 기내 배송 서비스 론칭하다. (24) | 2023.08.21 |
---|---|
코카서스,흑해, 카스피해 역사 특강을 소개합니다. (28) | 2023.08.21 |
두바이 신상호텔을 소개합니다. (15) | 2023.08.20 |
블라디보스톡 운항 재개하는 고려항공. (21) | 2023.08.19 |
인도네시아 발리로 LCC가 운항 할지도 모른다. (22) | 2023.08.19 |